ichigo+cake

지난주는 졸업작품의 재심사이자 전시심사가 있어서 폭풍같은 일주일이었다.
이틀에 한 번 자는 생활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위안은 과자와 동물의 숲 뿐.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먹는 양도 많아져서, 밥 먹고 뒤돌아서면 배가 고프고 또 고팠다.

우리는 밥 먹는 시간에는 꼭 티비를 켜는데,
요즘은 모리 미츠코 할머니의 '방랑기'라는 연극의 광고가 계속 나온다.
상연회수 1900회를 넘긴다는 둥, 46년째라는 둥..
그리고 이걸 쓴 극작가가 탄생100주년이란다.

참고로 모리 미츠코라는 저 할머니는 1920년생으로, 87세.
몇 년 전에 문화훈장을 받으면서 뉴스가 줄줄이 나오면서 나이를 알게 되었는데,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신 대단한 분이다.

'방랑기'는 모리 미츠코의 대표작으로, 방랑기라는 소설을 쓴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다룬 연극이다.
졸업 작품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져서였을까, 이번에 보지 않으면 영영 못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옥션질에 들어가서 27일 표를 구했다.
일 저지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엉뚱한 곳에 엄청난 행동력이라니까.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짜잔! 23일에 갑자기 옥션질을 해서 27일 표를 손에 넣었다!
공연은 3월까지이지만, 진작에 대부분 매진이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도 얼마 없는데다가 3월.
거기다 중요한 조연이 더블캐스팅이라 보게된다면 2월 6일 이전이 좋았다.
나는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쿠로야나기 테츠코를 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거든.
2째줄인 티켓은 가격이 쭉쭉 올라가는 바람에 정가 비슷한 가격으로 8번째 줄 구석.
우후훗. 운이 좋다면 좋았달까?

하지만 우리가 이 공연을 본다는 얘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했을 때,
다들 진지하게 놀란 얼굴로 '왜?' 라던가 '정말?' 이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곰손 말로는 '누가 그걸 보러가' 라고 했다는데..
누가 보긴.. 나는 표가 없어서 못 살 뻔 했다니까.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렇지만 사실 표를 사면서도 장소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우리.
알고보니 히비야역 근처의 '시어터쿠리에'란다.
그나저나 지금 사진을 올리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시어터 쿠리에'는 '시어터 크리에이션'의 줄임말이구나.

전날 밤 심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오후 3시의 공연을 보는 것은 역시 쫌 무리가 있었다.
달리고 달려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게 도착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들이 꽤 있으시네.
아.. 이래서 '왜?'라는 말을 들은 건가?

막상 자리를 잡으니 구석이긴 해도 생각보다 가깝고 괜찮았다.
단지 제일 구석자리라서 들어가려면 여러사람한테 인사를 해야해서 쫌 그랬다는 거?
두근두근 하면서 시작하길 기다렸는데,
사실 우리... 하야시 후미코라는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르잖아? 호호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花の命は短くて苦しきことのみ多かりき' 라는 문구가 스크린에 뜨고 막이 올랐다.
저 문구는 주인공인 하야시 후미코가 남긴 유명한 글로, 직역하자면 '꽃의 생명은 짧고, 힘든 일만이 많을 뿐'인데, 나는 문학적 센스가 떨어져서 멋들어지게는 못 바꾸겠다.
저 꽃을 여자로 봐도 작가 자신으로 봐도 인생으로 봐도 되겠지.

일단 처음에 모리 미츠코가 등장한 순간, 앞뒤에서 'わかいね~'라고 속삭이는 아줌마들.
그래. 솔직히 너무 젊으시다. 도저히 80대 후반의 할머니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저 할머니 3시부터 6시 45분까지 하는 5막짜리 공연을 하신다구!
깜짝 놀랄 일이지.

간단하게 줄거리를 말하자면, 작가 하야시후미코의 일생을 다룬 연극으로 후미코는 히로시마의 오노미치에서 상경하여, 빈곤한 생활을 보낸다. 그 와중에 여러번 사랑을 하고, 버림받아가면서도, 작가라는 꿈을 위해서 시와 소설을 계속해서 써나간다. 그러던 중,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한 '방랑기'를 발표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기 작가가 된다는 얘기.

1920년대가 주 무대인데, 모르긴 몰라도 그 시대의 일본이라고 한들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이란 정숙하고 말잘듣는 언니들이겠지.
하고 싶은 말은 하고 믿는 것은 자신 뿐인 후미코는 시대와는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워커홀릭.

젊었을때는 안해본 일 없이 고생하고, 인기 작가가 되서는 잠 못자고 글쓰고, 평생을 일한 워커홀릭 하야시 후미코.
80대 후반인 고령에도 매일매일 3시간씩 무대를 누비는 모리 미츠코.
더군다나 이번부터는 없어졌지만 2006년 공연까지는 매번 앞구르기를 했다더라. (앞구르기는 방랑기에서 굉장히 유명한 씬)
두 인물이 겹쳐지고, 저 할머니가 이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다면 다음에 누가 이 역을 맡아서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정말 바쁘고 가난한 와중에 이걸 봤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잖아!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그리고..
무대는.... 정말 좋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랑기'를 읽어봐야겠다.
극 중에서 시라사카라는 사람이 '하야시 후미코의 글은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를 꺼내 늘어놓은 느낌'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데, 네박사님에서 검색을 해보면 방랑기를 읽고, 꽤 불쾌해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
하지만 이 연극을 보면 그 불쾌함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게으름을 떨치고 과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Posted by
life in Tokyo l 2008/01/31 02:05   by 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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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곰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재미있었다. 옥션에서 비싸게 낙찰 받은줄 알고 쫄았는데.. 원래가 그정도 티켓이라서 다행이다. 손해보고 안산다는 점쟁이의 말은 이런때도 맞나보다. 게다가 동숲도 2500엔에 적당히 팔리고....ㅎㅎㅎ
    어쨌든 모리 할머닌 고령화 사회에 표상이라고나 할까... 나이들어도 활기차게 살아갈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것 같아. 모리 할머니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방랑기를 보기 할머니에 대한 편견이 좀 없어졌다고 할까?

    그나저나.... 나도 방랑기 읽어보고 싶더라. 마지막에 전남편인 사람이 시라사카의 말을 인용해서 칭찬하자나... 역시 현실은 쓰레기이지만..... 아름다울지도....

    2008/01/31 02:21
    • BlogIcon 유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역시 제일 신경쓰이는 건 유키짱이야. 그치?
      어떻게 됐을까. 유키짱!!

      모리할머니도 할머니지만 관객들을 보니 고령화 사회라는게 온몸으로 느껴지더라. 특히 내 앞의 보라색 머리 할머니. -_-;

      2008/01/31 02:23
    • BlogIcon 이찌  댓글주소  수정/삭제

      방랑기를 읽거든 감상을 말해줘ㅋ 그리고.....동숲을 팔았구나 =_=;;

      2008/02/03 22:34
  2. 은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제대로 일본문화를 즐기고 있구나.보통 이런거 잘 안보잖아?ㅋ

    2008/01/31 09:15
  3. 느질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싸이 방명록 좀 확인해주세요= _ =

    2008/01/31 12:29
  4. BlogIcon 이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_< 흥! 부러워!ㅋ

    2008/02/0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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